Chapter 1: Chapter 1
우주선의 창밖으로 푸른 행성이 점점 작아졌다. 이륜의 진동이 멎고 중력이 정상화되자, 에롤 휘태커는 좌석 안전벨트를 풀며 심호흡을 했다. 이번 휴가가 어떤 의미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일주일간의 병가. 그리고 화성 외곽 식민지에 있는 한 여자와의 약속.
도착한 식민지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번화했다. 광고 홀로그램이 거리를 덮고, 바와 여관, 구멍가게가 즐비했다. 지구의 번화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천장에 펼쳐진 별빛과 낮은 중력이 우주임을 실감나게 했다.
그녀는 예약한 숙소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큼한 체리 향수와 짧은 금발머리. 일주일간의 즐거움을 위해 돈을 지불한 그에게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휘태커 씨?"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저는 소피예요. 오늘 밤부터 잘 부탁드려요."
방은 작았지만 아늑했다. 중력이 0.8G뿐이라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그녀는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느긋하게 그를 기다렸다. 에롤은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긴장됐어요?" 소피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쓸었다.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우리 시간 많잖아요."
그가 그녀의 흐느끼는 숨결을 느끼며 몸을 밀어 넣었을 때, 무언가 이상한 전류가 그의 척추를 타고 흘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척추가 아니라 몸 전체. 갑작스러운 어지러움이 그를 덮쳤다.
"소피... 잠깐..." 에롤은 그녀에게서 몸을 떼려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목소리마저도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정상적이지 않았다. 너무 차분하고, 너무 계산적이었다.
"쉿, 금방 끝나요."
그의 시야가 흐릿해지고, 말초신경이 얼어붙듯 마비되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순간, 그는 익숙했던 감각이 전부 뒤바뀌는 것을 느꼈다. 무겁던 팔이 가벼워지고, 골반의 넓은 뼈가 낯설게 조여왔다.
그가 눈을 뜬 것은 몇 시간 뒤였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대 시트에는 그들이 함께 했을 때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소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침대 옆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홀로그램이 아니라 손으로 쓴 낡은 종이였다.
*당신의 몸은 내가 가져갑니다. 나는 여기서 다른 행성으로 갑니다. 나를 찾지 마세요.*
에롤은 종이를 읽은 뒤, 눈을 내리깔었다. 그리고 이상함을 눈치챘다. 손가락이 짧고 가늘었다. 목이 얇게 느껴졌고, 어깨가 좁았다.
거울 앞에 걸어가 본 그는 무릎이 풀릴 뻔했다.
거울 속의 얼굴은 그의 것이었다. 날카로운 턱선, 짧게 깎은 검은 머리카락. 그러나 어깨 아래부터는 완전히 다른 몸이었다. 매끈한 피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허리와 가슴. 남성의 얼굴과 여성의 몸이 맞붙어 있는 괴물이 거울 속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피."
그가, 아니 그녀가 낮고 헐떡이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니, 목소리도 달라졌다. 이건 여자의 목소리였다. 소피의 목소리.
에롤은 탁자에 손을 짚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마음이 조급해질수록, 새로 얻은 몸이 열기를 뿜어냈다. 가슴 아래에서부터 배꼽까지, 기다란 심장 줄기처럼 더운 기운이 흐르는 느낌. 지금은 당황하고 분노한 상태인데도 몸은 괴상하게 반응했다. 젖은 열기가 속옷을 적시고 있었다.
"제기랄."
그는 구겨진 종이를 파악하고, 먼지처럼 떨린 손으로 옷을 집어 들었다. 옷은 남자 것이었지만, 목을 파고드는 깃은 이제 목이 가늘이 되게 넓었다. 바지는 허리에서 흘러내렸다. 하필 소피의 방에는 여자 속옷만 남아 있었다.
그는 몸을 숨기고, 숙소를 떠나 지구행 티켓을 끊었다. 오가는 동안 승무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아가씨"라 부를 때마다, 그는 무릎이 떨리는 것을 억눌러야 했다.
지구에 도착한 뒤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남은 휴가 동안 그는 집에 틀어박혀 거울을 보며 계획을 세웠다. 몸을 되찾을 방법을 찾기로. 그러나 어떤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도, 식민지의 무단 개조 기술을 추적할 수 없었다. 소피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휴가가 끝났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에롤은 넓은 어깨를 일부러 웅크렸다. 통근용 코트를 입고, 구속복 같은 회색 작업복 안에 압축 밴드를 감아 가슴을 눌러 붙였다. 거울 앞에서 전보다 훨씬 좁아진 어깨선을 확인할 때마다 그의 뺨은 구겨졌다.
"휘태커, 출근이야?"
메이라 네어가 사무실 모서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항상 그렇게 날카로운 눈으로 사람을 관찰한다. 포니테일로 묶어 올린 검은 머리와 금 귀걸이가 형광등 아래 반짝였다. 네어 수석님."
"얼굴이 안 좋아 보여. 병가가 길어서 그런가?"
"괜찮습니다. 조금 피곤한 것뿐이라."
메이라의 시선이 에롤의 손목을 스쳤다. 손목이 가늘었다. 그가 소매를 쓸어내리며 재빨리 손을 감췄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무언가를 본 것처럼 움직였다.
"한동안 일이 많을 거야. 컨디션 관리 잘 해."
"알겠습니다."
회의실로 향하는 동안, 에롤의 몸은 다시 열을 뿜어냈다. 팬티 속의 축축함이 참을 수 없이 진해지는 기분. 화장실 문을 열고 좁은 칸막이에 들어가 앉는 그의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숨을 참으며 눈을 감는 동안, 그는 이제 압축 밴드 위로 튀어나온 가슴의 통증과 소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여기서 갑니다.*
이제 그는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시스템 분석가이자 아무도 모르는, 자기 몸에 갇힌 남자였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에롤은 일과를 철저히 지켰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압축 밴드를 조이고, 거울 앞에서 어깨선을 체크한 뒤, 가장 넓은 코트를 입고 출근했다. 점심시간에는 항상 가장 구석진 화장실 칸막이를 찾았고, 퇴근 후에는 집에 돌아와서야 겨우 숨을 킬 수 있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남자가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남자의 얼굴을 한 여자.
그리고 그날 저녁, 부서 회식이 잡혔다.
"휘태커, 이번엔 빠지면 안 돼."
메이라가 그의 책상에 기대어 말했다. 손목에 찬 데이터 밴드가 은은한 파란빛을 뿜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부드러웠지만, 거절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저, 오늘은 몸이 좀..."
"그 말은 지난달부터 계속 들었어. 팀장님도 그러는데 올해 처음으로 다 같이 모이는 자리라고. 딱 한 잔만 하고 가도 되니까."
에롤은 굳은 입가를 억지로 올렸다. "알겠습니다."
회식 자리는 강남 지구의 옥상 바에서 열렸다. 유리천장 너머로 별이 빛나고, 난간 너머로 도시의 네온이 은은하게 깔렸다. 동료들이 술잔을 부딪칠 때마다, 에롤은 코트 깃을 움켜쥐며 술잔을 입에 대는 척만 했다.
"야, 휘태커. 너 술 안 마시면 재미없잖아."
김 대리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때, 가슴의 압축 밴드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에롤은 굳은 얼굴로 웃었다.
"아, 그게... 오늘 위가 안 좋아서."
"너 항상 위가 안 좋다고 하잖아. 이번엔 진짜 마셔 봐."
술잔이 그의 앞에 밀려왔다. 소주가 아니라 외계 식민지에서 수입된 증류주, 푸른빛이 도는 액체였다. 메이라가 잔을 집어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한 잔이야. 네가 마실 때까지 기다릴게."
에롤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도수가 높은 독한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속이 뜨거워졌다. 두 번째 잔, 세 번째 잔이 이어졌다. 거부하는 그의 손을 누르는 동료들의 손이 거칠었다. 웃음소리, 잔이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기억이 끊긴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는 좁은 방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천장이 낮고, 벽지가 누렇게 변해 있었다. 여관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네온사인 간판이 "여관"이라는 글자를 흐릿하게 비추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려고 몸을 움직인 순간, 그는 자신의 옷이 벗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셔츠 단추가 풀려 있고, 압축 밴드가 바닥에 구겨져 떨어져 있었다. 회색 작업복은 다리 사이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김 대리가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한 채 에롤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뭐 하는 겁니까?"
에롤의 목소리는 잠에 절어 쉰 목소리였다. 김 대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술에 잔뜩 취해 충혈되어 있었다.
"휘태커, 너 왜 이러고 있어?"
"뭐가요?"
"네 몸." 김 대리는 비틀거리며 손을 내밀어 에롤의 가슴을 만졌다. "너 여자잖아."
에롤의 몸이 얼어붙었다. 아니, 얼어붙은 것은 몸뿐이었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이 올라왔다. 소피의 몸, 아니 이제 그의 몸이 된 이 육체가 갑자기 반응하기 시작했다. 젖꼭지가 서고, 허벅지가 떨렸다.
"그만..."
"왜? 왜 감췄어?" 김 대리의 손이 그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살이 손가락 사이로 밀려 나왔다. "너, 아까부터 계속 나한테 신호 보내고 있었잖아. 회식 자리에서도 나한테만 웃었잖아."
"아니에요, 저는—"
"조용히 해."
김 대리가 그의 팔목을 눌러 침대에 붙였다. 그의 몸이 뜨거웠다. 에롤의 몸도 뜨거웠다. 그의 몸은 혼란스러운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분노와 혐오, 그리고 그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낯선 욕망. 소피의 몸은 이런 자극에 이상하리만큼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러지 마세요... 제발."
"괜찮아. 아무도 안 와. 다들 술 취해서 자고 있어."
김 대리의 손이 그의 허벅지 위를 타고 올라갔다. 그는 몸을 비틀었지만, 이미 술에 취해 힘이 빠진 몸은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몸은 미친 듯이 반응하고 있었다.
"그만... 그만..."
목소리는 분명히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남자 목소리가 아니었다. 소피의 목소리였다. 높고, 가늘고, 떨리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거절하고 있었지만, 몸은 그와 반대로 떨리고 있었다.
김 대리가 그의 다리 사이에 들어섰다. 바지가 벗겨지고, 속옷이 내려갔다. 에롤은 눈을 감았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몸은 반응하고 있었다. 소피가 심어 놓은 이 육체는, 그런 반응을 통제할 수 없었다.
"녹아 있네." 김 대리가 낮게 웃었다. "사실은 원했잖아."
에롤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신음으로 변했다. 김 대리가 그의 허벅지 사이로 무릎을 밀어 넣었다. 부드럽게 열린 다리 사이로, 그의 것이 스며들었다. 에롤은 시트를 움켜쥐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귀로 흘러내렸다.
침대가 삐걱거렸다. 에롤의 몸은 파도처럼 출렁이며 그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분노와 수치심,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증발시켜 버리는 뜨거운 열기. 소피의 몸은 소피의 기술대로 완벽하게 움직였다. 에롤의 의지는, 이 새 몸 앞에서는 무력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김 대리가 몸을 떼어내고, 옆으로 쓰러졌다. 그는 곧바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에롤은 움직이지도 못한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정리했다.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웠다. 압축 밴드는 찢어져 있었다. 소매가 뜯긴 셔츠, 바지, 속옷. 그는 그것들을 다시 몸에 감쌌다. 손가락이 떨려서 단추를 채우는 데도 오래 걸렸다.
거울이 보였다. 벽에 걸린 낡은 거울 속에서, 그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눈가가 붉게 충혈되고,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여자의 얼굴. 그 위에 얹힌 남자의 눈빛. 그는 주먹을 쥐고,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계속 살아야 한다."
그것은 다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거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여관 문이 닫히는 소리에 에롤은 몸을 움츠렸다. 김 대리는 문 앞에서 돌아서서, 자신의 데이터 밴드를 들어 올렸다. 화면에 파란빛이 번쩍였다.
"휘태커, 이것 좀 봐."
그가 밴드를 에롤 쪽으로 돌렸다. 화면 속에서, 침대 위에 누워 눈물을 흘리는 여자가 보였다. 김 대리의 손이 그 여자의 가슴을 움켜쥐고, 그 여자는 신음을 흘렸다. 그 여자는 분명히 에롤이었다. 소피의 얼굴을 한, 남자의 의식을 가진 여자.
"멋지게 찍혔지?" 김 대리가 웃었다. "데이터 클라우드에 자동 업로드됐어. 내가 삭제하지 않는 한, 영원히 거기 있을 거야."
에롤의 손이 떨렸다.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슨... 무슨 뜻이에요?"
"뭐, 간단해." 김 대리가 걸어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충혈되어 있었지만, 술기운은 이미 빠져나간 것처럼 또렷했다. "네가 이제 내 거라는 뜻이지."
에롤은 고개를 들었다. 김 대리는 휴대용 밴드로 그의 턱을 받쳐 들었다.
"회사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남자인 척하고 다니는 여자, 아니야, 남자의 얼굴을 한 여자. 무단 생체 개조. 감사팀이 가만히 있을까?"
"...당신도 봤잖아요.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 몸은 그렇게 말 안 하던데."
김 대리가 손을 내밀어 에롤의 허벅지를 훑었다. 에롤은 몸을 떨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소피가 남긴 이 육체는, 낯선 손길에도 즉시 열을 뿜어냈다. 벌써 젖고 있잖아."
"그건..."
"말하지 마. 몸이 먼저 말하고 있어."
김 대리는 밴드를 주머니에 넣고, 셔츠를 풀었다. 에롤은 시선을 피했지만, 그의 손이 에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일주일에 두 번. 내가 부르면 와. 장소는 내가 정한다."
"그건..."
"아니면 이 영상을 인사팀에 보낼게. 선택은 네 몫이야."
에롤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또 흘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이 지났다. 에롤은 이제 김 대리의 부름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첫 번째는 회사 옥상 주차장의 밴 안이었다. 두 번째는 근처 모텔. 세 번째는 김 대리의 자취방. 에롤은 매번 그가 지정한 시간에 맞춰 나타났고, 그가 원하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압축 밴드는 더 이상 그에게 필요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그 시간만큼은 그는 완전히 여자였다. 김 대리는 그를 부를 때마다 "소피"라고 불렀다. 그것이 에롤을 가장 잔인하게 짓밟는 말이었다.
"소피, 여기 앉아."
금요일 밤. 김 대리의 자취방 소파에서, 그는 에롤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에롤은 말없이 앉았다. 아무런 저항 없이. 몸은 이미 그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 대리가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자, 에롤은 작게 숨을 삼켰다.
"이제 좀 익숙해졌네."
"..."
"말해 봐. 뭐라고?"
"그만해 주세요..."
"아니, 그게 아니지." 김 대리의 손가락이 그의 쇄골을 타고 내려갔다. "소피, 말해 봐."
에롤은 눈을 감았다. 목소리는 소피의 것이었다. 높고, 가늘고, 떨렸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요."
"더 잘 듣게."
"...그만... 그만하게 해줘..."
김 대리가 웃었다. 그의 손이 에롤의 몸을 탐하는 동안, 에롤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며, 몸이 반응하는 것을 느끼며, 그는 생각했다. 언젠가 이 몸을 되찾게 되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까. 아니면, 이렇게 무너져 내리는 것이 그의 운명일까.
월요일 아침, 에롤은 평소처럼 출근했다. 압축 밴드를 다시 감고, 넓은 코트를 입고, 어깨를 웅크렸다. 김 대리는 복도에서 그와 마주쳤을 때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롤도 고개를 숙였다. 팀 회의 중에 메이라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휘태커, 요즘 좀 나아진 것 같네. 얼굴색이 좋아졌어."
"네, 휴식 좀 취해서요."
"그래? 다행이네."
메이라의 시선이 그의 목을 스쳤다. 에롤은 재빨리 칼라를 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목덜미에 남은 자국을 가리기 위해 그는 며칠째 스카프를 착용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에롤이 화장실 칸막이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 소피의 몸. 그 사이에서 그는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김 대리가 부를 때마다, 그의 의지는 조금씩 부서졌다. 몸의 기억은 점점 더 소피의 것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완전히 소피가 되어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날 밤, 김 대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일 저녁, 여관. 평소와 같은 장소. 에롤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무덤덤하게, 다음 날의 일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소피를 만났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이해하는구나." 에롤은 소피에게 소리쳤다. "네 몸을 돌려줘!" 하지만 소피는 고개만 저었다. "이미 늦었어. 너는 이제 나야."
에롤은 꿈에서 깨어났다. 이불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소피의 웃음소리가 아직 귓가에 맴돌았다. *너는 이제 나야.* 방 안의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려 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오늘 저녁, 여관. 김 대리가 지정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 샤워를 했다. 손이 몸을 씻을 때마다 낯선 곡선을 따라 미끄러졌다. 어깨의 좁은 뼈, 허리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S자, 가슴의 무게. 이 몸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어느새 그의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는 거울을 피한 채 옷을 챙겨 입었다. 압축 밴드, 넓은 코트, 그리고 목덜미를 가릴 스카프. 완벽한 위장이었다.
오후 다섯 시, 사무실을 나선 그는 지하철을 타고 시내 반대편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의 인파 속에서 어깨를 웅크리고,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았다. 김 대리에게서 온 메시지가 액정 위에 떠 있었다. *여관 203호. 여섯 시까지.* 짧고 간결한 명령. 에롤은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여관에 도착했을 때, 김 대리는 이미 방 안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홀쭉한 유리잔에 담긴 붉은 액체가 형광등 아래 반짝였다. 그가 고개를 들어 에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늦었네."
"죄송합니다."
"괜찮아. 오히려 좋아. 기다리는 시간도 벌이가 있으니까."
김 대리는 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에롤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이 에롤의 코트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에롤은 숨을 죽이며 바닥을 바라보았다. 코트가 벗겨지고, 압축 밴드가 벗겨졌다. 가슴이 공기 속으로 쏟아져 나올 때, 김 대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예쁘네. 네가 이렇게 숨겨 두니까 더 끌리는 것 같아."
"..."
"말해 봐. 오늘은 기분이 어때?"
에롤은 눈을 감았다. 목소리는 이미 소피의 것이었다. 떨리고, 가늘고, 나약했다.
"...나쁘지 않아요."
"더 솔직하게."
"...네 몸이 원해요."
김 대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의 손이 에롤의 등 뒤에 있는 브래지어 고리를 풀었다. 그가 에롤을 침대 가장자리에 앉히고, 무릎을 꿇고 그의 다리 사이에 들어섰다. 바지를 내리고, 속옷을 내렸다. 그의 숨결이 허벅지 안쪽에 닿았다. 에롤은 침대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오늘은 내가 좀 섹시하게 해 줄게."
김 대리가 손을 내밀어 에롤의 젖은 틈을 쓸었다. 에롤은 숨을 삼켰다. 몸이 순식간에 반응했다. 질척한 액체가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김 대리가 그 액체를 손가락으로 발라 보여 주었다.
"녹아 있네. 항상 서 있지?"
"..."
"대답 안 하면 그 영상, 아까 누나한테 보낼까?"
에롤의 눈이 커졌다. "누나요?"
"내 누나. 우리 집에 살아. 아, 네가 안 만났겠네. 보낼까?"
"아니요. 그만둬요."
"그럼 대답해."
에롤은 입술을 깨물었다. 수치심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늘 서 있어요."
"좋아. 그럼 오늘은 어떻게 해 줄까?"
김 대리는 일어나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벨트가 달린 인공 음경을 꺼냈다. 투명한 실리콘 재질로, 내부에 작은 진동 장치가 내장된 최신형이었다. 에롤은 그것을 보고 몸을 움츠렸다.
"그건..."
"새 장난감. 지난주에 식민지에서 수입된 최신 모델이야. 고객의 몸에 맞춰 체온을 조절하고, 심박수에 반응해서 움직임이 달라져. 진짜 못지않게 좋을 거야."
"제발..."
"제발이 아니라, 네가 원해." 김 대리가 벨트를 허리에 차며 말했다. "몸이 먼저 말하게. 그게 네 방식이잖아."
에롤은 침대에 눕혀졌다. 김 대리가 에롤의 다리를 벌리고, 벨트의 끝부분을 그 사이에 댔다. 차가운 실리콘이 허벅지 안쪽에 닿자 에롤은 떨었다. 그러나 곧 체온이 올라가며 미지근하게 변했다. 내부의 진동 장치가 조용히 돌아가며 미세한 웅웅 소리를 냈다.
"들어간다."
그가 밀어 넣었다. 에롤은 이와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실리콘은 그의 몸의 온도에 맞춰 부드럽게 변형되며 내부의 벽을 눌렀다. 심박수에 맞춰 미세하게 맥동하는 움직임이 소피가 심어 놓은 신경을 정확히 찔렀다. 에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두 다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
"어때? 좋지?"
"...그만..."
"몸은 그렇지 않은데." 김 대리가 천천히 움직이며 말했다. "찌뿌둥하니 물이 흥건하네. 벌써 세 번째 오는 것 같은데."
에롤은 시트를 움켜쥐며 고개를 떨었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소피가 설계한 이 육체는 어떤 침입에도 충실하게 반응하도록 조정되어 있었다. 질벽이 미친 듯이 실리콘을 감싸 쥐고, 허리가 저절로 출렁였다. 분노와 수치심, 그리고 쾌락이 뒤섞인 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김 대리가 속도를 높였다. 진동 장치의 웅웅 소리가 커지고, 실리콘이 깊숙이 박힐 때마다 에롤의 몸이 경련하듯 튀었다. 에롤의 정신은 몸에서 분리된 것 같았다. 천장을 바라보면서, 그는 생각했다. 이 순간, 그는 완전히 소피였다. 남자의 의식은, 이 몸의 반응 앞에서 한낱 그림자에 불과했다.
"간다."
김 대리가 깊게 박으며 몸을 움츠렸다. 동시에 에롤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질벽이 조여 오며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왔다. 에롤은 목을 길게 빼고 신음을 흘렸다. 눈물이 다시 흘렀다. 끝나고 나서도 몸의 떨림은 오래도록 가라앉지 않았다.
김 대리는 벨트를 풀어 버리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는 곧바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에롤은 숨을 고르며 일어나, 흩어진 옷을 주웠다. 손이 떨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옷을 입으며, 김 대리의 자취방 곳곳을 훑었다.
첫 번째 달의 굴종은 단순한 저항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밤, 김 대리가 잠든 후 움직였다. 여관 방의 서랍, 자취방의 컴퓨터, 데이터 밴드의 클라우드 계정. 그는 매 회식 후의 기회를 이용해 김 대리의 휴대폰을 살폈다. 업로드된 영상의 위치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매번 실패했다. 김 대리는 영상을 클라우드에 업로드해 두었지만, 계정은 암호화되어 있었고, 에롤의 시스템 분석 능력으로도 뚫리지 않았다.
두 번째 달, 그는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김 대리와 가까워지는 척하며 정보를 캐내기 시작했다. 그는 김 대리에게 웃어 보이고, 그의 팔에 기대고, 그가 원하는 대로 불렀다. 김 대리는 그런 변화를 즐겼다. "완전히 내 여자가 됐네." 그는 에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조금씩 입을 열었다.
"그 영상, 어디 저장한 거예요?" 에롤이 어느 날 무심한 듯 물었다.
"왜 궁금해?"
"혹시 누가 보면 어쩌나 해서요. 저, 이제 당신 거잖아요. 그런 영상이 남아 있으면 나중에 곤란할 수도 있잖아요."
김 대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웃었다. "걱정 마. 웬만한 해커도 못 뚫어. 외부 저장장치에 넣어서 금고에 보관 중이야."
"금고요?" 우리 집에 있는 금고." 김 대리는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입을 막았다. "아, 말했네. 그래도 상관없어. 네가 그걸 찾을 수 있겠어?"
에롤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러나 그는 무표정하게 웃었다. "당신 거니까 안 찾아요."
그날 밤, 에롤은 김 대리의 자취방에서 잠든 척했다. 김 대리가 코를 골기 시작한 뒤, 그는 천천히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금고는 책장 뒤에 숨겨져 있었다. 비밀번호를 맞춰야 했다. 김 대리의 생년월일, 전화번호, 어머니의 생일. 그는 김 대리의 데이터 밴드에서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숫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용했다는 번호였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금고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다발의 지폐와 함께 작은 USB 드라이브가 놓여 있었다. 에롤은 그것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그러나 그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 하고 있어?"
에롤은 얼어붙었다. 천천히 돌아보니, 김 대리가 침실 문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완전히 또렷했다.
"그걸 들고 뭐 하려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놔."
에롤은 주머니에서 USB 드라이브를 꺼내 금고에 다시 넣으려 했다. 그러나 김 대리가 다가와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힘에 눌려 에롤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믿었잖아. 너, 점점 나한테 마음 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닥쳐." 김 대리가 에롤의 뺨을 때렸다. 따끔한 통증이 퍼졌지만, 에롤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김 대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끌어올렸다. "경고 한 번만 할게. 이런 짓 또 하면, 영상을 네 동료들한테만 보내는 게 아니라, 전 지구 네트워크에 뿌릴 거야. 너, 이름값 떨어질 각오해."
에롤은 눈물을 삼켰다. 고개를 끄덕였다. 김 대리는 손을 놓았다. 에롤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금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날 밤, 에롤은 여관으로 끌려가 다시 한 번 김 대리의 몸이 되어야 했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USB 드라이브는 못 가져갔지만, 이제 위치는 알아.*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완전히 다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다음 주, 에롤은 김 대리의 요구를 거절했다. 처음으로 명확한 거절이었다. 김 대리는 당황해하며 다시 영상을 들먹였다.
"정말 이러다가 큰일 나도 괜찮아?"
"그 영상, 당신 집 금고에 있는 거잖아요."
"저는 시스템 분석가야. 당신이 금고라고 말한 순간, 그 위치를 유추할 수 있었아." 에롤은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것은 거짓이었다. 금고의 위치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 대리는 입가가 떨렸다.
"이러다 우리 둘 다 망하기 싫으면, 조건을 바꿔요."
"조건?"
"영상의 원본을 삭제해 줘.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당신 거로 지낼게요. 안 그러면 이제 더 이상 안 와요. 영상을 뿌려도 좋아요. 그때 당신도 범죄로 고소할 거야. 강간과 협박. 감옥 갈 준비 돼 있어요?"
김 대리는 웃었다. 그러나 웃음에는 힘이 없었다. "겁줘?"
"겁주는 거 아니에요. 협상이에요." 에롤은 그가 하나도 모르는 여자로 변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소피의 몸은 낯선 용기를 주고 있었다. 김 대리는 잠시 침묵했다.
"...원본은 삭제해 줄 수 있어. 하지만 클라우드 백업까지는 어려워."
"그럼 백업 위치를 알려 줘. 내가 직접 확인할게."
김 대리는 결국 백업 서버의 주소를 알려 주었다. 에롤은 그 서버에 접속해 영상 파일을 찾아 삭제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클라우드 서버에 저장된 그 영상 파일에는, 영상 외에 다른 데이터가 포함되어 있었다. 숨겨진 메타데이터, 그리고 그것은 소피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암호화된 흔적과 연결되어 있었다. 에롤은 그 파일을 복사해 두고, 원본만 삭제했다.
그날 밤, 그는 혼자 앉아 그 데이터를 분석했다. 소피가 남긴 암호화된 파일. 해독에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시스템 분석가였다. 일주일 후, 그는 파일의 내용을 열어 보았다. 그것은 소피가 과거에 사용했던 데이터 전송 기록이었다. 출발지와 도착지, 그리고 그 사이에 오간 통신의 기록. 그 끝에, 한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누크 얀센.*
에롤은 화면을 응시했다. 그것은 한 명의 이름이었다. 소피와 연결된 누군가. 그는 그 이름을 검색했다. 식민지와 지구를 오가는 프리랜서 통신원, 아니, 더 정확히는 고급 기술을 거래하는 밀수업자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는 주소를 찾아냈다. 오늘 밤, 지구의 한 항구 도시에 있다는 정보였다.
에롤은 노트북을 덮고 일어섰다. 창밖의 도시 네온이 어둠 속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그는 벽에 걸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 소피의 몸. 그 모든 것의 근원을 찾아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옷을 챙겨 입고, 문을 나섰다. 그리고 김 대리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못 가요. 다음에 다시 연락할게요.*
메시지를 보낸 뒤, 그는 항구 도시로 향하는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소피가 남긴 실마리. 아누크 얀센. 그녀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또 이 모든 것이 어디로 이어질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김 대리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